GoodNovel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전생, 나는 사지가 부러진 채 소씨 집 앞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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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나의 쌍둥이 여동생만 좋아한다. 내가 손발이 잘린 채 집 앞에 버려져도 슬픔 따윈 없었다.

“재수없게 집 앞에서 이런 모습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것!”

“정말 쌍둥이인데 어떡해 동생 털끝만큼 따라오지 못하니!”

“넌 우리 가문의 수치야!”

“안 돼!”

극심한 통증에 소우연은 큰소리로 외치며 눈을 번쩍 떴다.

소우연 앞에 펼쳐진 건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으며 향초가 불에 타고 있는 소리가 들렸고 은은한 향도 퍼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괴롭히던 통증도 전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방을 쓱 훑어보았고 단번에 이 방이 신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고개를 숙여보니 자신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이 혼례복은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를 위해 3년에 거쳐 직접 만든 혼례복이었는데 결국 소우연이 이 혼례복을 입고 시집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소우연의 결혼 상대는 악명이 자자한 회남왕 이육진이다.

상운국에서 명망 높은 전쟁의 신이었던 이육진은 3년 전 전쟁에서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결국 목숨 걸고 싸워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온몸의 신경들이 전부 잘려 폐인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이육진은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으며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노비와 시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기도 했다.

황제가 이육진에게 혼인을 몇 차례나 하사했지만 신부들은 혼사를 치른 이튿날 바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회남왕 관저 밖에 버려졌다.

그러다가 한 달 전, 이육진의 모친 덕빈은 황제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다시 한번 혼인을 하사해달라고 했고 그 상대가 바로 진원 장군 가문의 둘째 딸 소우희였다.

어렸을 때부터 소우희를 애지중지 키운 소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사랑하는 딸을 이육진에게 보낼 수 없었기에 결국 소우연이 쌍둥이 여동생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소우연은 오래 전부터 연모하는 사내가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함께 큰 두 사람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

때문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기 싫었고 더군다나 회남왕에 관한 소문이 너무 흉흉한 탓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혼사가 이뤄진 당일 날, 소우연은 소우희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멀리 도망치기도 전에 다시 잡혀오게 되었다.

크게 노한 덕빈은 소우연의 사지를 부러트린 뒤, 그녀를 소씨 저택 대문 앞에 던져 버렸다.

소우연은 가족들이 자신을 집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치료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바람과 달리 소씨 저택의 대문은 끝까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다.

그렇게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 바람에 온몸에 상처까지 심각했던 소우연은 결국 대문 밖에서 얼어 죽고 말았지만 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죽고 나서 시체를 거둬가지도 않았다.

소우연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은 그저 소설 속의 하찮은 조연이고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은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때문에 소우연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그녀에게 신경 쓸 리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저 소우희 대신 희생하기 위해 존재한 사람이었다.

한편,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우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예전의 기억들을 되돌려보고 있었다.

소설 속 내용에 의하면 이육진은 최대 악역이다. 얼굴이 망가지고 몸 전체가 폐인이 된 탓에 이육진은 성격이 변태적이고 포악했으며 소설 속 남녀 주인공들을 괴롭히다가 결국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어있다.

소우연은 이육진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명성이 자자한 전쟁의 신이 결국 그런 최후를 맞이하다니. 그의 인생도 소우연 못지 않게 불행하고 처참했다.

소우연과 소우희는 모친 뱃속에 있을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점쟁이는 소우희가 귀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이고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태어나는 순간 소씨 가문에 불행을 불러올 거라고 했다.

점쟁이가 말한 것처럼 소우연이 태어난 뒤로 소씨 가문에는 사건 사고들이 유난히 많았기에 가문 사람들은 점쟁이 말을 굳게 믿은 채 소우연을 홀시하고 냉대했다.

소우연은 평생 소씨 가문을 위해 희생했지만 결국 대문 앞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심지어 시체 일부가 들개들에게 먹혔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결국 소우연의 시체를 거둔 사람은 이육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 문이 열렸고 휠체어에 탄 남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혼례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의 얼굴은 절반 이상이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화상을 입지 않은 반대쪽 얼굴에는 어마 무시한 칼자국 흉터가 나 있었다.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공포스러웠다.

살짝 겁을 먹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옷을 꽉 잡은 채 조심스럽게 이육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생에는 절대 섣불리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회남왕 관저에서 도망치는 순간, 소우연은 또다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덕빈은 아들 이육진을 그 누구보다 걱정했기에 아들을 모욕하는 사람은 절대 가만두지 않았다.

소우연은 이제 이육진이 떠도는 소문처럼 성격이 그리 난폭하지 않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그만 물러가거라.”

낮게 깔린 이육진의 목소리에 뒤에 서있던 호위무사는 소우연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그렇게 방 안에는 이육진과 소우연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소우연은 조금 긴장이 되긴 했지만 사실 이육진이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전생에 그녀의 시체를 거둔 것으로만 봐도 이육진은 소문처럼 그렇게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소인이 시중을 들어도…”

잔뜩 긴장한 소우연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모습에 이육진은 소우연의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무서워?”

“아닙니다. 소인은… 소인은 그저 조금 긴장이 돼서…”

말까지 더듬는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당연히 내가 무섭겠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 무서운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지만 치료가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 소우희가 장난을 치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는데 그때 당시 가족들은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면서 발만 동동 굴렀고 소우연은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없이 치료제를 연구했었다.

그 결과, 흉터 치료에 효과가 매우 훌륭한 약을 조제해냈고 덕분에 소우희는 몸에 난 화상 흉터가 깔끔하게 없어졌다.

이육진의 흉터가 소우희보다 훨씬 심각하지만 그래도 흉터가 꽤 많이 치료될 수는 있을 것이다.

소우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이육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손이 휠체어에 닿기도 전에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을 툭 밀쳐냈고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얼른 해명했다.

“소인에게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 이제 밤도 깊었는데 왕야께서도 이만 쉬셔야 할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이육진은 말없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우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소우연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씨 가문에서 큰 결심을 했네.”

코웃음을 치던 이육진은 직접 휠체어를 끌고 침대 곁으로 가더니 두 손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툭 쳤다.

다음 순간, 허공 위로 날아오른 이육진은 손바닥을 빠르게 앞으로 뻗었고 그대로 침대 위에 완벽하게 착지했다.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보며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이육진은 완전히 폐인이 된 게 아니었어! 두 다리는 더 이상 쓰지 못하지만 무술 실력은 여전히 대단해! 그럼 지금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

소우연은 침대에 누운 이육진을 보며 한참동안 넋이 나간 표정을 짓다가 자신도 저 침대에 올라가야 하나 망설여졌다.

이육진의 태도로 보면 소우연과 잠자리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지만 내일 아침 덕빈이 시녀를 보내어 가채를 살펴보고 두 사람이 합방하지 않은 걸 발견하면 소우연을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올라와.”

소우연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이육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고 움찔한 소우연은 자신의 옷을 꽉 잡고 있다가 우물쭈물하며 다가갔다.

소우연이 침대에 스스로 올라가려던 그때, 이육진이 갑자기 돌아눕더니 손을 뻗어 방 안을 비추던 초를 꺼버렸고 이내 방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다음 순간, 소우연의 손목을 덥석 잡은 이육진은 그대로 확 잡아당겼고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침대 위로 올라와 이육진 품에 와락 안기게 되었다.

보기보다 훨씬 튼튼한 이육진의 몸매에 소우연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소리 질러.”

이육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소우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이육진이 손을 뻗어 소우연의 허리끈을 확 풀어헤쳤고 소우연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 그녀의 옷을 벗겼으며 결국 내의밖에 남지 않았다.

“악!”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고 찬바람이 느껴지자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허리를 손으로 꽉 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 몸에 손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알아서 큰소리로 신음소리를 내.”

한 번도 신음소리를 낸 적이 없는 소우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계속 망설였다가 이육진이 직접 나설까 봐 걱정이 된 소우연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소리를 냈다.

한편, 소우연의 나른한 목소리에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냉랭하고 덤덤하게 다시 말했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

소우연은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지만 그만큼 살고 싶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최소한 이육진은 외부에 떠도는 소문처럼 그렇게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이 아니기에 비위만 잘 맞추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이육진의 품에 안겨 몸을 잔뜩 움츠린 소우연은 그렇게 덜덜 떨면서 30분 동안 신음소리를 냈고 목소리가 갈라질 때쯤, 이육진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전했다.

“그 정도면 됐어.”

소우연은 얼른 입을 꾹 다물었고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육진은 몸을 살짝 돌려 소우연을 놓아주었고 윗몸을 벌떡 일으킨 소우연은 다급하게 이불을 잡아당겨 자신의 몸을 가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우연은 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던 탓에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곁에 누운 소우연의 숨소리가 차분해지자 이육진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든 걸 보면 소우연은 이육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 소씨 가문 아가씨는 소문으로 들은 것과 많이 다른 듯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이육진은 왠지 모르게 소우연에 대해 거부감이 많이 들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소우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커다란 얼굴 하나가 보였다. 얼굴 절반이 화상을 입은 채 쭈글쭈글했고 나머지 절반에는 보기 흉할 정도로 심각한 흉터가 크게 나 있었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윗몸을 벌떡 일으켰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이육진의 얼굴을 몰래 훑어보았다.

한편, 이육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우리 부인이 생각보다 대담하네. 이렇게 대놓고 부군을 유혹하고 말이야.”

흠칫하던 소우연은 고개를 숙인 순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알몸을 보게 되었고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채 급하게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육진은 다시 침대에 누운 소우연을 보며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안 일어날 거야? 아니면 내가 직접 너에게 옷을 입혀주길 기다리고 있는 건가?”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손을 더듬거리다가 곁에 놓인 옷을 찾게 되었고 급하게 한 벌씩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어젯밤까지 분명 내의를 입고 있었는데 왜 지금은 알몸이 된 걸까?

소우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표정이 태연한 이육진이 그녀의 옷을 벗겼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잠버릇이 안 좋은 그녀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스스로 옷이 벗겨졌을 수도 있다.

소우연은 이내 옷장에서 하늘색 겉옷을 골라 깔끔하게 차려입은 뒤, 이육진에게 다가가 그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이육진이 필요 없다고 얘기했어도 이건 그녀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한편, 이육진은 아무 말없이 소우연의 손길을 받아들였고 소우연은 곁눈질로 침대보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 위에는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덕빈이 시녀를 시켜 검사하러 올 게 뻔한데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소우연은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 그 피를 침대보에 묻혀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소우연의 걱정을 꿰뚫어본 이육진은 소우연이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기 전에 휠체어 곁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쓱 베더니 새어나오는 피를 침대보 위에 떨어트렸다.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얼른 이육진의 상처를 살폈고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지금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시는 겁니까? 반드시 베어야 한다고 해도 제 손가락을 베셨어야죠!”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이육진을 너무 걱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우연은 바로 입을 꾹 닫았다. 저번 생에 자신의 시체를 거둬준 사람이 이육진밖에 없었기에 다시 태어난 지금, 소우연은 이육진에 대해 본능적으로 믿음과 신뢰가 생겼고 왠지 그가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이육진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소우연을 쳐다보았다.

소우연은 돌아서서 어젯밤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들 중에서 장신구 함을 찾아 맨 아래층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런저런 약들이 많았고 이는 전부 소우연이 직접 만든 약이었다.

소씨 가문에 있을 때, 가족들 대부분이 무장이었기에 여기저기 다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소우연은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했으면 하는 마음에 열과 성을 다해 의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소우연은 효과가 좋은 약들을 스스로 연구하여 만들어냈고 그 약들 덕분에 소씨 가문 군대는 남들보다 치유가 훨씬 빨랐고 나라에 큰 공도 많이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우연의 공로는 결국 동생 소우희에게 전부 빼앗기곤 했다.

“이 약은 상처 치료에 꽤 효과가 좋습니다. 제가 얼른 상처에 발라드리겠습니다.”

소우연은 하얀 고약을 손가락에 조금 묻혀 이육진의 상처에 발라주었고 손가락에서 통증이 살짝 느껴진 이육진은 고개를 숙여 소우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상처를 꼼꼼하게 살피던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입을 삐죽 내민 채 상처에 바람을 후후 불었다가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재빨리 입을 꾹 닫았다.

한편,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왠지 기억 속에 있던 그 사람이 떠올랐고 특히 소우연이 발라준 이 고약은…

조금 뒤, 소우연은 휠체어에 탄 이육진을 모시고 덕빈에게 인사를 올리러 갔다.

황제께서 이육진의 혼사를 잘 마무리 지으라고 덕빈을 회남왕 관저에 3일 머무를 수 있게 허락했다.

소우연은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덕빈이 머무른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신혼방을 떠나자마자 나인 한 명이 몰래 신혼방으로 들어가 침대보에 묻은 핏자국을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났다.

소우연과 이육진이 덕빈이 머무른 방에 도착했을 때, 신혼방에 들어가 핏자국을 확인하던 나인이 두 사람보다 먼저 와있었고 덕빈의 방 안에 들어가 덕빈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었다. 그러자 덕빈은 만족스럽게 피식 웃었다.

“소인 덕빈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

덕빈 앞에 서서 잔뜩 긴장한 소우연은 손바닥에 땀이 잔뜩 맺혔다. 소우연은 자신이 혹시라도 말실수를 저질러서 덕빈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

한편, 덕빈은 몸을 잔뜩 움츠린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이육진에게 돌렸다. 이육진은 표정이 덤덤했지만 조금 전 소우연이 인사를 할 때 본능적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기에 그래도 자신의 부인을 신경 쓴다는 뜻이다.

“고개를 들고 가까이 오너라. 네 얼굴을 자세하게 보고 싶구나.”

덕빈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소우연은 덕빈이 혹시라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챌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씨 가문에서 아무도 모르게 소우희 대신 소우연을 이육진에게 시집보냈기에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면 소씨 가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소우연은 소씨 가문이 원망스럽지만 가문 모든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덕빈은 소우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그저 소우연을 쓱 쳐다봤을 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조금 뒤, 인사를 올린 소우연과 이육진은 이내 방을 나섰고 덕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곁에 서있던 나인에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소씨 가문 둘째 딸이 어떠한가?”

“소인이 예전에 소씨 가문 둘째 따님을 우연히 뵌 적이 있습니다. 저분은 아무래도 둘째 따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소우연이 아니꼬운 듯 대답했고 덕빈도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허허, 소씨 가문에서 둘째 딸을 끔찍하게 아낀다고 들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는 딸을 내가 제대로 혼내줘야 하지 않겠냐. 감히 겁도 없이 내 아들을 희롱하다니. 소씨 가문에서 아주 겁을 제대로 상실한 모양이구나.”

덕빈은 애초에 아무 이유 없이 소우희를 이육진의 처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전에 이미 소씨 가문 상황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기에 소우연을 보자마자 그녀가 소우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아들이 소우연을 거부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일단 모른 척 넘어가긴 했지만 소씨 가문에서 신부를 함부로 바꾼 일은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소우연은 이육진을 모시고 덕빈의 방을 나서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그렇게 겁내는 것이냐?”

이육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우연은 또 한번 화들짝 놀랐고 그 모습에 이육진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야, 제가 오늘 친정에 인사를 올리러 가야 하는데 혹시 왕야께서 저와 함께 가실 수 있으십니까?”

소우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싸늘하게 굳은 눈빛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다.

흠칫하던 소우연은 이육진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육진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절대 집을 나서고 싶지 않을 것인데 그녀는 왜 이 점을 고려하지 못했을까?

“왕야, 전 다른 뜻이 전혀 없습니다. 가시기 싫으시면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이육진은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없이 휠체어를 돌리며 떠났고 소우연은 이육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 없이 막말을 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고 후회가 막심했다.

이육진은 당연히 소우연과 함께 친정에 돌아가지 않았지만 대신 자신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 진규를 소우연에게 보냈다.

빈손으로 회남왕 관저의 마차에 올라탄 소우연은 이내 소씨 가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소씨 가문 대문을 보며 소우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곳은 그녀가 16년이나 생활한 곳이고 그녀의 본가지만 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우연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지만 그저 존재만으로 큰 잘못이었다.

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앞으로 다가가 대문을 두드렸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하인 한 명이 문을 열었다.

하인은 소우연을 본 순간, 얼굴이 허옇게 질리더니 말까지 더듬었다.

“오, 오셨습니까, 큰아씨?”

“그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이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려고 하자 하인이 본능적으로 소우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큰아씨, 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소우연은 하인이 왜 자신을 못 들어가게 막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다가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이 확 변했다.

소설 속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소우연은 손발이 잘려 소씨 가문 대문 앞에 버려졌을 때, 소씨 가문에서는 소우희의 혼사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고 소우희의 혼인 상대는 바로 소우연과 어렸을 때부터 혼약이 맺어진 평서왕 세자 이민수이었다.

소설 속에서 이민수는 단 한순간도 소우연을 좋아한 적이 없으며 그가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은 처음부터 소우연의 동생 소우희였다.

그리고 이민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상운국 미래의 황제였다.

입술을 꽉 깨문 소우연은 앞을 막고 있는 하인을 확 밀어내고는 빠른 걸음으로 대청을 향해 걸어갔다.

이와 동시에, 소씨 가문 대청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소우희는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고 부친 소홍범은 호탕하게 웃고 있었으며 소우희의 이 혼사에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이와 반면, 자신의 큰딸 소우연은 진작 까맣게 잊고 있었다.

“큰아씨,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때, 하인의 목소리가 대청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싸늘하게 굳은 소우연이 대청에 나타났고 그녀를 본 순간, 소홍범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네가 어떻게 돌아온 것이냐?”

소홍범이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물었고 소우연은 아버지의 그런 표정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소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러러봤던 아버지인데 지금 소우연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혐오와 불만밖에 남지 않았다.

한편, 이민수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소우연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회남왕 관저에 보내진 소우연이 살아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버님 질문이 참 이상하네요? 제가 이집에 돌아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오늘은 혼인을 치른 제가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와야 하는 날입니다. 설마 아버님께서 이를 잊으신 겁니까?”

소우연의 말에 안색이 조금 나아진 소홍범이 태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돌아왔으면 저기 뒤뜰에 가 있거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소우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소우연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바로 뒤뜰로 갔을 것이지만 이제는 신분이 다르기에 아버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아버님, 혹시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도 있는 것입니까?”

소우연이 태연한 모습으로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고 예전에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운 소우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들의 비위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대문 앞에서 죽음을 당해도 시신조차 거둬주지 않을 사람들이다.

한편, 소우연의 행동에 화가 난 소홍범이 언성을 높였다.

“이게 지금 버릇없이 무슨 짓이냐? 넌 애초부터 우리 대화에 끼어들 자격도 없었어. 이만 물러가라는 말 안 들려?”

소우연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소홍범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님, 혹시 제 신분을 잊으신 겁니까? 전 어제부터 회남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럼 아버님께서도 저를 보시면 예를 갖춰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칫하던 소홍범은 화가 더욱 치밀었고 감히 인사를 하라는 소우연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때, 곁에 앉아있던 소우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긋한 목소리로 소우연을 원망했다.

“언니, 어떻게 아버님에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 어떻게 아버님에게 인사를 하라고 할 수 있어? 언니 지금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거야.”

“그 입 다물지 못 해? 감히 건방지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너와 나의 신분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몰라? 네가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소우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쏘아보며 큰소리로 말했고 소우희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 채 몸을 휘청거렸다.

소우희는 평소에 늘 눈치보기 바쁘고 큰소리 한번 못 내던 소우연이 왜 갑자기 태도가 이렇게 바뀌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우희는 소우연이 회남왕 관저에 보내지기 전, 회남왕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인지 확실하게 얘기해줬는데 소우연이 왜 어젯밤 회남왕 관저에서 도망치지 않고 오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연 낭자! 우리 우희 낭자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마시오!”

울먹이는 소우희의 모습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민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싸늘하게 말했고 소우연은 그런 이민수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민수는 예전에 이런 태도가 아니었는데…

소씨 가문에서 냉대를 받았지만 이민수만은 소우연에게 너무도 잘해주었다. 가끔 선물도 주고 소우연을 데리고 달도 구경하고 소우연이 다쳤을 때 위로도 해줬는데… 이 모든 게 가짜라는 건가?

그럼 십몇 년 동안 이민수가 보여준 모습은 진심이 전혀 없는 가짜였단 말인가?

소우연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소우연!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에게 불만이 있다면 앞으로 다시는 소씨 가문에 돌아오지 말 거라!”

정신을 번쩍 차린 소홍범이 소리를 질렀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전 이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전 회남왕에게 시집을 갔으니 이제 회남왕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 명심해주십시오. 집안에서 저를 만났을 때 허리를 숙여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아도 전 옛정을 생각해서 넘어가줄 것입니다. 하지만 밖에서 저를 만났을 때에도 이렇게 무례하게 구시면 그땐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싸늘하게 말을 마친 소우연은 돌아서서 떠났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소홍범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편, 숨을 크게 들이마신 소우연은 대청을 떠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소우연은 이 저택에서 가장 작은방에서 살았고 자그마한 마당에는 약재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항시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웠기에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고 질병도 많았다.

소우연은 그런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위해 약재를 심고 그 약재들로 약을 만들었지만 만든 약들은 매번 소우희에게 빼앗겼다.

그래도 소우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 공을 전부 소우희에게 빼앗긴다고 해도 소우연은 기분이 좋았다.

가끔 소우연이 약을 가지고 가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그 약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소우희를 따라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진 소우연은 이내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챙겼고 혼자서 이렇게 많은 짐을 들 수 없었기에 결국 진규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금 전까지 분명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진규는 소우연이 부르자 바로 어디선가 나타났고 방 안 상황을 쓱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호위병 두 명을 데리고 와서 소우연의 짐들을 밖으로 옮겼다.

소우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을 힐끔 쳐다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떠났다.

“언니…”

발을 떼기도 전에 소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소우연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소우희는 큰 서러움을 당한 표정으로 달려와 소우연의 옷소매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

“언니 지금 날 원망하고 있는 거지?”

소우연이 손을 살짝 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소우희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언니가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는 걸 언니도 잘 알잖아. 어머님 아버님은 그런 내가 불쌍해서 회남왕에게 시집을 보내지 못한 거야. 언니, 오늘 민수 오라버니와 혼사를 논의했던 것도 내 뜻은 아니었어. 다만 언니가 나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을 간 사실이 들키면 안 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언니 대신 평서왕 관저에 시집을 가는 거야. 그렇게 내가 언니 대신 평서왕 세자빈이 되고 언니가 나 대신 회남왕비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어머님과 아버님의 마음을 언니도 이해해줘야지. 그렇게 마음 상하게 하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소우희가 자신도 힘들었다고 구구절절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소우연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소우희의 말재주가 이렇게 좋으니 소우연은 전생에 동생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해? 내가 왜?”

소우연은 싸늘하게 굳은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고 소우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언니 아직도 날 많이 원망하고 있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언니가 날 용서해줄 수 있어?”

소우연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소우희를 빤히 쳐다보자 소우희가 눈물을 쓱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어야 화가 풀리겠어?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날 더 예뻐했다는 걸 나도 알아. 오라버니들도 그렇고. 다들 언니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언니는 소씨 가문 딸이잖아. 회남왕과 결혼한 것도 마냥 나쁜 일은 아니야. 어찌 됐든 회남왕은 왕실 사람이고 신분도 높잖아. 내가 민수 오라버니와 혼사를 맺은 게 문제라면 난 이 혼사를 취소해도 돼. 언니 기분만 좋아질 수 있다면 난 상관없어.”

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몸을 휘청거리자 소우연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동생이 또 무슨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앞을 가로막는 걸 보면 뭔가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하다.

바로 이때, 소우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갑자기 손을 들고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고 백옥같이 하얀 소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 올랐다.

소우연은 소우희의 돌발 행동에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혼자서 갑자기 미쳤을 리는 없고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게 확실히다.

이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누군가에 의해 옆으로 확 밀린 소우연은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너무도 익숙한 한 남자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를 부축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째려보았다.

“소우연! 네가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우희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돼! 우희가 네 일로 얼마나 많이 자책하고 있는 줄 알아? 어젯밤에도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밤새 울었어. 네가 회남왕 저택에 가서 고생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네가 어떻게 우희한테 이럴 수 있어!”

소우연에게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큰소리로 외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소우연의 큰오라버니 소현우였다.

어렸을 때 소우연과 소현우는 엄청 친하게 지냈지만 언젠가부터 소우연을 대하는 소현우의 태도가 점점 차가워지더니 나중에는 심지어 소우연을 쳐다보는 눈빛이 혐오로 가득했다.

소우연은 기사회생하고 나서야 이 모든 게 소우희가 몰래 뒤에서 이간질하고 소우연을 모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 제일 존경하던 큰오라버니를 보면서 소우연은 그저 씁쓸하고 마음이 시렸다.

“오라버니께서 제가 때렸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잊으신 게 있습니다. 회남왕비인 제가 철없고 버릇없는 아가씨를 매로 교육한다고 해도 저를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을 하던 소우연은 천천히 소우희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번쩍 들고는 소우희의 반대쪽 얼굴을 강하게 내리쳤다.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손톱이 소우희의 얼굴을 긁고 말았다. 뺨이 얼얼해지자 소우희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고, 이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편, 갑작스러운 상황에 소현우도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우연을 쳐다보았다.

“너!”

소현우가 소우연의 뺨을 때리려던 그때, 진규가 빠르게 나타나 소현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육진은 진규에게 소우연의 안전을 확실하게 지키고 절대 아무도 소우연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소현우는 진규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입을 떡 벌리고는 소우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육진의 성격이 난폭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살인도 함부로 저지른다는 걸 알기에 소우연이 회남왕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을 때 다들 소우연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 당시 소현우는 소우연의 처지가 안타깝고 마음도 아팠지만 너무도 연약하고 가녀린 소우희를 생각하면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육진은 소우연에게 꽤 잘해주는 듯했고, 심지어 자신의 곁을 지키던 호위무사까지 소우연에게 내어주었다."

소현우는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소우연은 그런 소현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저희 이만 갑시다.”

소우연이 진규에게 말을 건네자, 두 사람은 곧 돌아서서 떠났다.

소현우는 멀어져 가는 소우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오라버니…”

이때, 소우희가 조심스럽게 소현우를 불렀고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소현우는 얼른 소우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얗게 앳된 소우희의 뺨에 깊은 상처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벌겋게 퉁퉁 붓기도 했다.

“너무 많이 다쳤어!”

소현우는 얼른 소우희를 부축하여 방으로 돌아가 약을 발라주었다.

한편, 소씨 가문을 나선 소우연은 마차에 오른 뒤 마지막으로 자신이 16년 동안 살았던 저택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담담하게 시선을 거뒀다.

이제 소우연은 소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것이며 앞으로 마주친다고 해도 그저 모르는 사람인 듯 지나칠 것이다.

소씨 가문 대문 앞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들개한테 시신이 물어 뜯겼던 그날, 소우연과 소씨 가문의 모든 인연은 끝이 났다.

회남왕 관저에 도착하자 저택 안에 있던 하인들이 마차에 실은 짐들을 소우연과 이육진 방으로 옮겼다.

방에 들어온 소우연은 짐을 풀다가 자신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향초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 큰 마님을 위해 만든 것이다. 젊었을 때 갖은 고생으로 큰 마님은 늘 두통이 심했고 그 탓에 평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소우연은 많은 의서들을 공부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향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몇 개월의 시간을 들여 열 손가락이 전부 까진 결과 진정향을 성공적으로 조제해냈다.

그 뒤로 큰 마님은 잠을 청하지 못하는 날이 없었으며 두통도 많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갖가지 약들은 전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이다. 평소에도 다치는 일이 많았기에 소우연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들어서 상비해 두었다.

소우연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노력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우스웠다.

한편, 이육진 곁으로 돌아온 진규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에서 당했던 일들을 이육진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고 이를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육진이 차갑게 웃었다.

소씨 가문의 계획이 너무도 뻔하게 보였다. 이민수가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언젠가 큰 일을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애지중지 키운 작은 딸을 평서왕 관저에 시집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계획은 절대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소우연이 3년 전 어디서 살고 있었는지, 남강에 갔었던 적은 없는지 가서 확실하게 알아보거라.”

손에 들고 있던 병서에 시선을 돌린 이육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고 고개를 끄덕인 진규는 빠르게 사라졌다.

서재 안에는 향초가 켜져 있었고 만약 소우연도 이곳에 있었다면 이 향초가 바로 자신이 큰 마님의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낸 향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편, 소우연은 약들을 서랍 안에 잘 정리해둔 뒤, 의서 한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때, 창문이 바람에 흔들렸고 방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자 소우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굳게 닫았다.

“왕비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밖에 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소우연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의서를 내려놓은 소우연은 그제야 날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육진은 어디 갔지? 왜 아직도 안 돌아오지?’

소우연이 방 문을 열자 밖에 서있던 어린 시녀 한 명이 소우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왕비님.”

“저기… 왕야께서 오늘 외출하셨느냐?”

“왕야께서는 현재 서재에 계십니다.”

하긴, 다리가 불편한 이육진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거의 외출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품을 하던 소우연은 방으로 돌아가 겉옷을 걸치고는 다시 방을 나섰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소인 명심이라고 합니다.”

“명심이 네가 길을 좀 안내하거라. 왕야께 겉옷을 가져다주려고 한다.”

소우연의 말에 흠칫하던 명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비님, 소인이 일단 물어보고 나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물어본다니? 누구한테 물어본다는 것이냐?”

이 저택에서 소우연이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그 어떤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물어보거라.”

“네, 왕비님.”

명심은 이내 곁채로 향했고 마침 한 여인이 곁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

“정연 언니, 왕비님께서 왕야께 겉옷을 드리러 가시고 싶다고 하십니다.”

명심의 말에 정연은 본채를 힐끗 쳐다보고는 빠르게 다가와 소우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소인, 왕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날씨가 많이 추운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왕야께 겉옷을 드리러 가도 되겠느냐?”

소우연의 말에 정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이 관저에 시집온 여인들은 하나같이 나쁜 꿍꿍이를 품고 있었으며 의도를 가지고 회남왕에게 접근했기에 결국 이튿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밖에 버려졌다.

하지만 소우연은 그 여인들과 많이 다른 것 같았다.

혼인 첫날, 침대보에 피를 묻혔을 뿐만 아니라 친정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바퀴를 끄는 소리가 들렸고 진규가 이육진을 모시고 돌아왔다.

“왕야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육진은 사람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본채 안으로 향했고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와.”

“네.”

소우연은 바로 방으로 들어갔고 정연은 하인에게 목욕 물을 준비하라고 했다.

방에 들어갔지만 소우연과 이육진은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조금 전 이육진이 소우연을 지나칠 때 소우연은 그의 몸에서 익숙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조금 뒤, 정연이 하인들을 데리고 들어와 욕조 안에 물을 채웠고 갈아입을 옷도 챙겨왔다.

“왕야, 제가 씻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우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이번 생에 이육진과 묶여 있어야 하는 신세라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한편, 이육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래.”

말을 마친 이육진은 손을 쓱 내둘렀고 정연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하인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소우연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결혼 첫날, 본의 아니게 이육진에게 알몸을 보여줬는데 이제는 이육진의 알몸을 봐야 한다니.

소우연은 손발이 굳은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고 기다리다 못한 이육진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게 싫은 거면 왜 씻겨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소우연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고 다급하게 외쳤다.

“전 싫은 게 아니라 긴장한 것뿐입니다.”

인생을 두 번이나 살았지만 남자의 벗은 몸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육진은 아무 말없이 휠체어를 끌고는 욕조로 향했다.

욕조 안에는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병풍을 통해 옷을 벗고 있는 이육진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조금 뒤, 이육진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고 소우연은 다시 한번 마음 다짐을 했다.

‘안 돼. 계속 이렇게 말로만 잘하겠다고 하는 걸로 부족해! 잘 살기로 했으면 저자를 부군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또 저번 생처럼 덕빈 마마 심기를 건드려 손발이 잘릴지도 몰라.’

입술을 꽉 깨문 소우연은 욕조로 다가갔다.

“왕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홀딱 벗은 이육진의 상체를 본 순간, 소우연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수건을 적셔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소우연의 손길이 이육진의 어깨와 팔, 그리고 가슴을 스치자, 이육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난 뒤, 참다못한 이육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내 윗몸이 그렇게 더러운가? 계속 윗몸만 닦아주네? 아래는 씻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소우연은 멈칫하다가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뒤 손수건을 밑으로 내렸고 다음 순간, 이육진이 소우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제대로 못 할 거면 비켜!”

“아닙니다, 왕야. 저는 그게 아니라…”

“아니라고?”

도발하듯 되묻던 이육진은 소우연의 손목을 확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욕조 안으로 끌어 들였고 돌발 상황에 제대로 반응도 못한 소우연은 욕조에 풍덩 빠진 채 엉덩이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지기도 했다.

소우연이 그 물건을 치우려고 손으로 덥석 잡은 순간, 이육진이 언성을 높였다.

“건방지게 이게 무슨 짓이냐!”

이육진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목소리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기댈 곳이 없어진 소우연은 그대로 욕조 안에 머리까지 잠기게 되었다.

“쿨럭쿨럭…”

목에 물이 들어간 소우연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기침을 했고 겨우 욕조 안에서 얼굴을 뺐을 때, 이육진은 이미 욕의를 걸친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세상에! 내가 조금 전에 왜 그걸 손으로 잡은 거지? 이육진은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할 거야! 그래서 화가 난 거고! 평범하게 잘 살고 싶었는데 이게 대체 뭐냐고!’

이육진은 소문처럼 그리 난폭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하기 쉬운 상대도 아니었다.

어차피 욕조에 들어간 김에 소우연은 일단 씻기로 했다.

조금 뒤, 씻고 나온 소우연은 정연이 준비한 옷을 입은 채 침대 곁으로 다가왔고 침대 곁에 걸치고 앉아있던 이육진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이육진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든 소우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자마자 소우연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육진은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옷도 벗어야 돼.”

말을 마친 이육진은 태연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웠고 소우연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내의만 남긴 채 옷을 다 벗었다.

초가 꺼지자 방 안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고 소우연은 더듬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소우연 전에 이육진과 혼사를 치렀던 여인들은 전부 간첩이기에 결국 이육진에게 살해된 것이다.

이육진은 소문처럼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소우연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소우연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불을 덮은 소우연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첫날밤처럼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별다른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던 이육진은 소우연의 신음소리를 듣자 머릿속에 갑자기 조금 전 소우연에게 그 물건을 잡혔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

순간 몸이 뜨거워진 이육진은 미간을 확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설마 내가 벗겨주기를 바라는 건가?”

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첫날밤 소우연이 잠들고 나서 이육진이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겼다는 뜻인가?

이런 추측에 소우연은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이미 회남왕비이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잠자리를 가지자고 해도 거절할 수 없는데 옷을 벗으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요구였다.

이불 속으로 숨어든 소우연은 옷을 전부 벗은 뒤 내의를 곁에 놔두려고 했지만 이육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우연은 입술을 살짝 오므린 채 옷을 건넸고 이육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옷을 바닥에 툭 던졌다.

가만히 누워있던 소우연은 옆에 있던 이육진이 본인 옷도 벗고 있는 게 느껴지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합방하자는 뜻인가?

소우연은 너무 긴장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이불로 몸을 꼭 덮은 채 꿈쩍도 못했다.

“소리를 내.”

이육진이 옷을 벗으며 말했지만 소우연은 어둠속에서 이육진을 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싫은 거냐?”

이육진이 소우연에게 고개를 돌리자 화들짝 놀란 소우연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소우연은 다시 신음소리를 냈고 30분 뒤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됐어.”

소우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조금 뒤, 이육진은 이미 잠든 듯했지만 소우연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했고 머릿속으로 소설 내용을 곱씹어봤지만 소설 속에 이육진이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매일 소우연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한 것도 이육진이 합방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지. 조금 전에 목욕을 할 때 손에 잡은 물건이 분명 딱딱하고 컸는데 능력이 없을 리가 없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우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을 청하려고 했고 바로 이때, 이육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더 내고 싶은 거야?”

“아, 아닙니다.”

“그럼 왜 아직도 안 자고 있는 것이냐?’

“지금 자려고 했습니다.”

이불을 손에 꼭 잡은 소우연은 바로 눈을 꼭 감았고 겁이 나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몇 분 뒤, 소우연의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이육진은 그제야 서서히 눈을 떴다.

손을 뻗어 소우연 눈앞에서 흔들었지만 소우연은 전혀 반응이 없었고 이육진은 소우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가까이 댔다.

그 향기가 확실하다.

그럼 그때 당시 남강에서 그를 구해준 사람이 소우연이 맞는 건가?

다음날.

하인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정연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보자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채 하인들에게 방을 깔끔하게 치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이육진의 몸을 씻겨주었다.

“어마마마는 궁으로 돌아가셨느냐?”

“덕빈 마마께서는 오늘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왕야께서 깨시면 왕비님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셔서 주상께 인사를 드리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이육진은 그저 피식 웃을 뿐 가겠다거나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왕비는 어제 많이 피곤했으니 깨우지 말 거라. 그리고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하고 싶다는 건 하게 놔두거라. 너희들이 잘 따라다니기만 하면 될 것이다.”

말을 마친 이육진은 휠체어를 끌고 본채를 나섰고 시녀들이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었다.

한편, 소우연은 침대에 누워 이육진이 한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그럼 어젯밤 덕빈 마마에게 들려주기 위해 신음소리를 내라고 했던 건가?’

소우연은 한참 전에 깼지만 알몸 상태라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바퀴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소우연은 그제야 침대에서 조용하게 일어났고 인기척을 들은 정연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연은 소우연에게 입을 옷을 건넸다.

혼인 첫날밤과 어젯밤, 본채에서 신음소리가 꽤 크게 들렸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왔을 때 옷들도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이로써 정연은 마음속에 이번 왕비가 전에 시집온 왕비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왕비를 깨우지 말라고 왕야께서 직접 명하셨으니 이건 왕야께서 왕비를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다.

곁에 서있던 명심이 소우연에게 옷을 입혀주려던 그때, 정연이 한걸음 나섰다.

“내가 하겠다.”

그 말에 명심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정연은 시녀들 중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시녀이며 지금까지 왕야 한 분만 모셨는데 왜 갑자기 왕비를 모시겠다는 것이지?

한편, 정연의 행동에 소우연은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 이육진이 그녀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한 건 그녀가 회남왕에게 총애 받는 여자라는 걸 이 집안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육진은 소우연에게 그리 좋은 태도를 보인 적이 없는데 왜 소우연을 도와주려고 하는 걸까?

소우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옷을 입고 세수를 마친 소우연에게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왕야께서는 아침을 드셨느냐?”

소우연의 물음에 정연이 대답했다.

“왕야께서는 보통 서재에서 아침을 드십니다.”

그럼 이육진은 평소에 서재에서 밤을 보낸다는 뜻인가? 그래서 아침 식사를 서재에서 하는 거겠지?